자연다큐멘터리

개미 꽁무니 빨아 먹던 시절

盛月 2007. 4. 11. 10:57
개미 꽁무니 빨아 먹던 시절
[아빠 어렸을 적엔 5] 불량식품 이야기
이시백 기자 seeback@hanmir.com  
 
준.

잘 사는 거와 못 사는 기준을 먹는 걸로 재던 시절이 있었단다. 하루 세 끼 밥을 먹으면 잘 사는 집이었지. 점심은 대개 수제비나 죽으로 때우곤 했다. 수제비는 밀가루를 치대어 손으로 뚝뚝 떼어 끓이는데, 멸치로 국물을 내어 끓일 정도가 되면 제법 살림이 넉넉한 집이었다. 밀가루는 두 사람의 손이 악수를 하는 그림이 그려진 포대에 담겨 있었는데, 그 악수 그림이 외국에서 보내온 원조물자 표시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단다.

그때는 배불리 먹고도 늘 헛헛해 하던 시절이었다. 요즘 다이어트 하는 사람들은 부러워할 이야기지만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던 때였다. 과외도 없고, 학원도 못 가던 시절이니, 오로지 산으로 들로 뛰면서 노는 아이들에게 세 끼 밥으로 배가 채워질 리가 없었지. 그때는 무언가 좀 별나다 싶은 걸 보면 일단은 입으로 가져갔단다. 아카시아 어린 줄기부터 메뚜기, 돼지감자며 개구리 뒷다리까지, 입에서 넣어서 먹을 만하면 삼키고, 아니면 뱉는 식이었지.

달콤하고 시큼한 추억


▲ 개미 ⓒ이시백 편집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단 맛, 신 맛을 좋아하는 것은 변함이 없더구나. 네가 어렸을 때 먹던 ‘아이셔’라는 사탕을 기억하니? 아빠가 어렸을 때는 무얼 먹었는지 아니?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개미를 잡아 꽁무니를 빨았단다. ‘아이셔’라는 사탕보다 아마 열 배는 더 시었을 것이다.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노라면 아이들은 개미핥기처럼 발밑에 돌아다니는 개미를 찾느라 바빴단다. 그 덕분에 아빠네 동네 개미들은 모두 꽁무니가 찌부러져 있었지. 개미는 진딧물 꽁무니를 빨고, 아이들은 개미 엉덩이를 빨았지.

신맛을 내는 ‘싱아’라는 풀도 있었는데, 며느리 배꼽이라는 가시달린 풀잎도 즐겨 먹곤 했단다. 심지어는 누나들이 봉선화 꽃물 들일 때 쓰던 백반이란 걸 핥아먹기도 했지.

단맛을 내는 군것질은 더욱 귀했었지. 사탕은 돈이 없어 사 먹기 어렵고, 이따금 손수레 밀고 엿장수가 찾아오면 애들은 떼를 지어 따라다녔지. 가위로 두들겨 엿을 떼어내는 목판엔 하얗게 밀가루가 뿌려져 있었는데, 애들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단다.

엿 조각이나 가루들이 섞여 있어 들척지근한 맛이 나는데, 엿장수의 영업을 방해하지 않으며 민첩하게 손가락으로 그것을 찍어 내온다는 것은 상당한 솜씨를 요구했단다. 자칫 잘못하였다가는 엿장수 가위에 머리에 불이 나도록 얻어맞기 십상이었으니까.


▲ 며느리배꼽 ⓒ이시백
사정이 이러다 보니, 단맛이 조금이라도 섞였다면 무엇이든 입으로 즐겨 들어갔단다. 어느 날, 동무 하나가 집에서 쓰고 버리는 치약을 가지고 나왔다. 알루미늄 껍질을 찢어내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치약 찌꺼기를 빨아 먹는 걸 보고 아이들은 혀가 빠지도록 내어놓고 “한 번만 빨게 해 달라”고 쫓아다녔다.

그 가운데 아빠도 끼어 있었는데, 치사한 동무가 쉽게 내어 주질 않았다. 결국 한 번도 그 박하같이 화한 맛을 보지 못한 아빠는 집에 들어가 마침 산 지 얼마 안 되는 치약을 통째 들고 나왔단다. 그리고 ‘동방신기’를 보며 환호하는 요즘 애들보다 더욱 뜨겁게 아우성치는 친구들 손바닥에 한 줄씩 쭈욱 짜 주었지.

포장지에 벌이 그려진 흑사탕비누라는 게 있었다. 벌꿀로 빚기라도 한 듯, 너무 향이 달콤하여 얼굴에 비누칠을 하다가 그것을 입에 넣고 빤 적이 있단다. 발암물질이니, 위생이니 하는 것은 아예 듣도 보도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니, 혹 호기심으로라도 따라 하지 말거라.

늘 껄떡거리는 건 모든 아이들의 공통된 일이었다. 언덕 비탈에 돼지감자를 심은 집이 있었는데, 한 아이가 거기서 처음 보는 고구마 비슷한 걸 캐서 먹었다. 그걸 본 모든 아이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돼지감자를 찾아 언덕 밑으로 파고 들어간 아이들은 하루 저녁 만에 결국 그 집을 비스듬히 내려 앉히고 말았단다.

불량식품이 더 맛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군것질은 더욱 다채로워졌단다. 개미 꽁무니나 빨던 아이들에게 학교 앞은 그야말로 호화로운 잔치였다. 철철이 새롭게 등장하는 군것질 장수들이 끊이질 않았다. 이른바 학교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는 불량식품의 원흉인 셈이지.

우선 가장 이르게 등장하는 이가 누구냐? 바로 칡 장수다. 알이 잔뜩 든 칡뿌리를 톱으로 썰어 파는 칡 장수가 나타나면, 학교 주변은 온통 씹다 뱉은 칡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잔에 담아 파는 앵두장사. 여름철 배탈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복숭아 장사, 덜 익은 복숭아를 사카린 물에 담가 팔았단다. 이런 천연식품(?) 장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단다.

흑설탕을 국자에 녹여서 거기에 소다가루를 넣어 부풀린 뒤 쇠로 막든 틀을 찍어 파는 ‘찍어먹기’ 장수야말로 학교 앞 불량식품의 원조 격이었다. ‘찍어먹기’는 단맛과 함께 경품까지 걸려 있어 아이들을 열광시켰다. 허리가 잘록한 눈사람 모양부터 스페이드 모양에 이르기까지 난이도가 각각 다른 ‘찍어먹기’는 굳혀진 설탕 과자의 찍혀진 모양을 부러뜨리지 않고 떼어내면 공짜로 하나를 더 주었다.

손톱 끝으로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아이들도(그를 위해 선생님들의 온갖 학대에도 불구하고 길게 손톱을 기르기도 했다) 수행학습의 결과로 바늘이라는 도구를 이용하는 지혜를 찾아냈는데 그건 반칙에 해당했다. ‘찍어먹기’ 장수의 예리한 심문을 피하기 위해 바늘 자국을 침으로 녹여 지워야 했다. 정말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지.

때로는 완성 일보 직전에 댕강 허리가 잘리는 비운을 겪기도 했는데, 아빠는 그럴 때면 침으로 그걸 살짝 붙인 후, 네 순진한 이모들을 시켜 경품을 받아 오게 시켰단다. 아빠는 무얼 했느냐고? 물론 골목에 숨어서 지켜보았지.

‘찍어먹기’를 능가하는 설탕과자가 있었으니 설탕을 녹인 물로 화려한 그림을 그려내는 장수가 있었다. 공작이며, 독수리며, 기차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아이들은 그를 미켈란젤로보다 뛰어난 예술가로 보았단다. 이른바 설탕예술가의 원조였지.

‘찍어먹기’ 장사는 끝없이 개발에 힘써 오랜 연구 끝에 ‘달고나’와 ‘쨈’이라는 신상품을 개발해냈단다. 굳은 우유 같은 사각덩어리를 국자에 녹인 후 소다로 부풀리는데 설탕과는 또 다른 맛을 냈지. 국자에 보리차 같은 물에 녹말가루 같은 걸 넣어 데우면 만들어지는 ‘쨈’은 한국판 푸딩이라고 하겠다.

이 밖에도 날로 까다로워지는 아이들, 특히 여학생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다양한 신제품이 속속 등장했다. 옷핀으로 초장에 찍어먹는 멍게부터 다슬기와 바다 달팽이와 같은 해산식품과 은행처럼 빚은 인절미 조각에 콩가루를 묻혀 이쑤시개에 꿰어 파는 전통식품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롭기만 했단다.

이 밖에 분유가루를 굳혀 만든 과자, 아빠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쓴맛을 보았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구멍가게에 놓여 있던 삼각형 모양의 우유 과자가 구미를 당겼다. 어렵게 돈을 마련한 아빠는 드디어 그것을 손에 넣게 되었단다.

입안에 감도는 침을 감당치 못하며 아빠는 우윳빛으로 뽀얀, 어느 것은 분홍빛으로 물도 들였다.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얼마를 씹었던가. 당장 입안에 퍼져야 할 고소하고 들치근한 유제품의 맛 대신, 거의 석회 가루를 씹은 듯한 뒷맛만이 입안에 가득했다.

웬만해선 입안의 것을 되돌려 내지 않는 아빠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양복점에서 재단할 때 쓰는 분필인 ‘쵸크’라는 것이었다. 아빠가 이렇게 쉽게 분유가루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다 이유가 있단다.

예전에 한국의 불쌍한 어린이들을 돕자며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물자 가운데 탈지분유가 있었다. 대개는 교회에서 나누어 줬단다. 아이들은 그것을 얻어먹기 위해 한 명도 빠짐없이 예배당에 다녔단다.

심지어는 무당집 아들도 갔다. 노래를 부르고, 눈을 감고, 또 한참 잔소리를 들은 뒤에야 손바닥에 뽀얀 가루우유를 받을 수 있었다. 때가 새카만 손바닥에 하얗게 구멍이 나도록 그것을 핥아먹었다. 그 맛의 유혹이 빚어낸 참혹한 불상사였다.

학교 앞의 ‘방과 후 학습’ 강사들

학교 앞에는 불량식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단다. 온갖 종류의 놀이학습까지 갖추는 교육적 배려가 있었단다. 수많은 장사꾼들이 청소년문화 발전을 위해 고안한 프로그램들이 ‘방과 후 학습’으로 이어졌단다.

우선 가장 많은 게 ‘찍기’라는 놀이학습이었다. 봉지에 담은 번데기를 놓고 숫자가 적힌 뺑뺑이판을 돌리면 닭털인지 꿩털인지가 달린 바늘 침을 내리꽂았다. 대개는 꽝이지만, 그래도 한 봉지는 기본으로 주어 자라는 어린아이를 격려했단다.

그런데 언젠가는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100봉이라는 금을 어느 아이가 용케도 맞추는 별 일이 벌어졌단다. 몹시 기분이 상한 얼굴로 아저씨는 큼지막한 봉지 하나에 퍼 담아 주었다.

100봉의 번데기를 기대하며 환호성을 지르던 아이들은 말 그대로 100개의 봉지에 담아 주기를 요구했단다. 그러나 도끼눈을 뜨고 부릅뜬 아저씨는 그 큼지막한 봉지 하나가 100개의 봉지와 같은 양이라며 아이들에게 물체의 부피에 대해 가르쳤단다.

생태환경 체험학습도 있었단다. 자박지 가장이에 여러 개의 칸을 나누고 거기에 숫자를 적은 뒤 방개를 풀어놓는 놀이였단다. 다이빙대처럼 생긴 곳에 국자에 담긴 방개를 떨어뜨리면 방개는 쏜살같이 어느 칸인가로 기어들어갔다.

그 칸에 놓인 상품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개는 주인이 얼마나 고도의 훈련을 시켰는지 ‘꽝’이라고 적힌 곳으로만 기어들어갔다. 생태환경 체험학습의 대표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병아리 장사였지. 대개는 며칠 내로 ‘꽝’이 되고 말지만, 용케 키워서 여름에 삼계탕을 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고학년에게 맞는 수리탐구 프로그램으로는 확률과 수리력을 높인다는 ‘오곱’과 ‘화투장 찾아내기’가 있었다. 주사위를 엽차 잔에 담아 흔들어 번호를 맞추면 다섯 배를 준다는 것이 ‘오곱’이고, 화투장 세 장을 이리저리 돌려서 어느 것을 찾아내는 것인데, 눈앞에서 번쩍하고 사라지는 요술에 속아 주머니를 털리기 일쑤였다.

그 충실한 수리탐구 교육자들은 소풍가는 날까지 쫓아 와서 아빠는 가져간 용돈을 급기야 다 바친 적도 있었단다. 그 끈질긴 교육자는 돈을 털린 아빠에게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가져온 사과와 김밥까지 걸고 하라”며 기회를 주었다. 결국 아빠는 네 할머니께서 ‘니꾸사꾸(왜말이지만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쓴다)’에 잔뜩 넣어준 사과며, 김밥이며, 사이다까지 몽땅 내어 주고 말았단다.

참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이 아이들 눈을 속이는 야바위라는 걸 알게 되었단다. 요즘은 학교 앞에 그런 ‘방과 후 강사’ 대신에 컴퓨터 게임방이 생겼더구나. 그런데 그 많던 불량식품 같은 아저씨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한둘은 남아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학원 차에 실려 썰물처럼 사라지는 아이들을 보며 허탈해 하는 아빠도 혹시 불량식품 아저씨가 아닐까.

준, 아빠도 ‘불량 아빠 클럽’에 가입해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