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비’ 새로운 전설의 시작 | |||||||||||||||
실물크기 돌 구해 비문 첫 글자 새겨 | |||||||||||||||
우리민족 사상 최고의 국운 융성기가 어느 때였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든지 주저 없이 배달민족의 상무정신을 드높인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 시대를 꼽을 것이다. 반도의 몇 배나 되는 드넓은 만주벌을 손안에 넣고 민족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영락.永樂)를 쓴 태왕의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고 능은 국내성(집안)에 있다. 구리시 광개토태왕 동상 옆에 완벽복원 태왕의 능 옆에 서있는 태왕비(碑)는 서기 414년 장수와 3년에 세워진 높이 6.39m, 너비 1.5m, 두께 l.53m의 거대한 사면석비(四面石碑)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인 중국에서도 광개토태왕비를 가장 큰 석비로 인정하고 있다. 중국에 다녀온 분들은 알겠지만 태왕비를 민족의 자존심으로 생각하고 참배를 가는 우리와는 달리 중국 사람들은 태왕비를 돈 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광개토태왕 동상을 세운 경기도 구리시는 동상 옆에 실물크기의 광개토태왕비를 4월말까지 복원하기로 하고 28일 비석에 비문의 첫 문장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중 첫 글자인 유(惟)자를 새겼다. 남한에서는 제일 많은 1500여점의 고구려 유물이 나온 구리시는 고구려가 4~5세기초 아차산 일대에 보루성을 쌓고 백제와 대치했던 곳으로 태왕비 비문에 “영락 6년, 태왕이 아단성(구리시 아차산)을 얻고 아리수(한강)를 건넜다”는 문구가 새겨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태왕비에 미쳐 산 전홍규 전각가가 비문 새겨 태왕비에 새겨진 글자는 총 1804자, 이중 판독이 가능한 1775자를 새길 ‘한국 금석문 각자예술 연구원’ 전홍규(호:香石. 59세)원장은 “이번 태왕비 복원의 고비마다 태왕의 영령이 도와주셨음을 세삼 느꼈다”고 말했다. 30여년 전까지 붓을 들고 서예의 길을 가던 서예가였던 그는 70년대 중반 태왕비의 위조 문제로 동양 삼국이 들끓자 붓 대신 정을 잡고 초정 권창윤 선생께 사사 받아 금석학의 외길을 걸어왔다. 전 원장은 20여년 전부터 실물크기의 태왕비를 복원하기로 작정하고 백방으로 돌을 구해봤지만 마땅한 돌을 구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돌 구하기에 골몰했던지, 한 번은 자다가 현몽해 남한강가에서 태왕비와 똑 같은 모양의 한자 남짓한 청오석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100여개의 태왕비를 복원한 전 원장은 돌가루와 시멘트를 섞어 실물크기의 태왕비를 만들기도 했다. 태왕사신기 마지막 회에 나온 태왕비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전 원장은 전국 각 청오석 채석장마다 태왕비의 실물크기만한 돌을 찾아 헤매 인 지 20여년 만에 올해 초 보령의 한 채석장에서 100여톤의 청오석이 발견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돌을 인수하자마자 구리시에서 “태왕비를 복원하겠다”는 부탁이 왔다니, 태왕의 영령이 도와주셨다는 말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이윽고 자문위원회의 고증을 거쳐 100여톤의 원석을 이 고장에 사는 중요무형문화재 이재순 석장(石匠)이 다듬고 다듬어 50여톤의 비신(碑身)을 완성 했다. 집안시에 있는 원비석의 재질은 응회암으로 같은 화강암 계통이지만 밀도가 청오석보다 낮아 10여톤의 무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일본인 위조 이전 탁본 구해, 진실까지 복각 태왕비에 새겨진 글씨체는 전서, 해서, 예서, 행서, 초서 등 적게는 5체, 많게는 7개의 글씨체가 섞여있다. 전 원장은“금석학계에서는 5개 이상의 글씨체가 복합된 비석으로 태왕비가 유일하다”며“태왕비의 글씨 크기는 사방10~15cm로 평균 13cm인데 이 같은 오차는 종이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서 새긴 것이 아니라 돌 위에 직접 먹줄을 치고 글씨를 새겼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직접 돌가루와 시멘트를 섞어서 만든 실물크기 모형에 글씨를 새길 때 두 사람이 먹줄을 튕겨보니 정말 똑 같이 오차가 나더라는 것이다. 이번 태왕비 복원에 사용한 탁본은 일제 때 일본육군참모본부 소속 중위 사코 가케노부(酒勾景信)등이 석회를 발라 위조한 선명한 탁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중국에서 뜬 탁본을 구해 위조 이전의 모양을 완벽하게 복원할 예정이며 중국인들이 때운 비의 굴절부분도 원래대로 복원할 생각이다. 전 원장은 "복원할 태왕비는 글씨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풍화돼 마모된 부분까지 탁본대로 복원할 것이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일본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부분도 위조 이전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상, 태왕비, 고구려역사기념관에 이어 테마공원까지 민선2기 때 광개토태왕 동상을 세우고 4기 들어 태왕비를 복원하게 된 박영순 구리시장은 “재임 시에 호태왕의 동상과 비를 세우게 돼 영광”이라며“이미 국민성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고구려역사기념관과 고구려 테마공원까지 완성해 중국에 빼앗긴 고구려 역사를 되찾아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시장은 “고구려가 망할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눌러앉았다고 알려진 보장왕의 둘째 아들 약광(若光)의 60대손인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의 코마(高麗)신사의 궁주(宮主)를 비롯한 약광의 후손들이 태왕비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더욱 뜻 깊은 제막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태왕비가 세워 질 구리시 교문동 미관광장 바로 옆에는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유적지와 태왕사신기의 세트장인 ‘고구려 대장간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찬란했던 문화를 이어받아 배달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우뚝 설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Oh my news)에도 보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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