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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 새로운 전설의 시작

盛月 2007. 12. 31. 10:27
광개토태왕비’ 새로운 전설의 시작
실물크기 돌 구해 비문 첫 글자 새겨
 
송영한
 
▲ 교문동 미관광장에 우뚝 선 광개토태왕 동상 옆에 복원할 태왕비     © 구리시

우리민족 사상 최고의 국운 융성기가 어느 때였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든지 주저 없이 배달민족의 상무정신을 드높인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 시대를 꼽을 것이다.

반도의 몇 배나 되는 드넓은 만주벌을 손안에 넣고 민족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영락.永樂)를 쓴 태왕의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고 능은 국내성(집안)에 있다.

구리시 광개토태왕 동상 옆에 완벽복원

태왕의 능 옆에 서있는 태왕비(碑)는 서기 414년 장수와 3년에 세워진 높이 6.39m, 너비 1.5m, 두께 l.53m의 거대한 사면석비(四面石碑)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인 중국에서도 광개토태왕비를 가장 큰 석비로 인정하고 있다.

중국에 다녀온 분들은 알겠지만 태왕비를 민족의 자존심으로 생각하고 참배를 가는 우리와는 달리 중국 사람들은 태왕비를 돈 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광개토태왕 동상을 세운 경기도 구리시는 동상 옆에 실물크기의 광개토태왕비를 4월말까지 복원하기로 하고 28일 비석에 비문의 첫 문장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중 첫 글자인 유(惟)자를 새겼다. 

남한에서는 제일 많은 1500여점의 고구려 유물이 나온 구리시는 고구려가 4~5세기초 아차산 일대에 보루성을 쌓고 백제와 대치했던 곳으로 태왕비 비문에 “영락 6년, 태왕이 아단성(구리시 아차산)을 얻고 아리수(한강)를 건넜다”는 문구가 새겨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 태왕비 비문의 첫 글자인 생각할 유(惟)자를 시각(始刻)했다.     ©송영한

태왕비에 미쳐 산 전홍규 전각가가 비문 새겨

태왕비에 새겨진 글자는 총 1804자, 이중 판독이 가능한 1775자를 새길 ‘한국 금석문 각자예술 연구원’ 전홍규(호:香石. 59세)원장은 “이번 태왕비 복원의 고비마다 태왕의 영령이 도와주셨음을 세삼 느꼈다”고 말했다.

30여년 전까지 붓을 들고 서예의 길을 가던 서예가였던 그는 70년대 중반 태왕비의 위조 문제로 동양 삼국이 들끓자 붓 대신 정을 잡고 초정 권창윤 선생께 사사 받아 금석학의 외길을 걸어왔다.

전 원장은 20여년 전부터 실물크기의 태왕비를 복원하기로 작정하고 백방으로 돌을 구해봤지만 마땅한 돌을 구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돌 구하기에 골몰했던지, 한 번은 자다가 현몽해 남한강가에서 태왕비와 똑 같은 모양의 한자 남짓한 청오석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100여개의 태왕비를 복원한 전 원장은 돌가루와 시멘트를 섞어 실물크기의 태왕비를 만들기도 했다. 태왕사신기 마지막 회에 나온 태왕비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전 원장은 전국 각 청오석 채석장마다 태왕비의 실물크기만한 돌을 찾아 헤매 인 지 20여년 만에 올해 초 보령의 한 채석장에서 100여톤의 청오석이 발견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돌을 인수하자마자 구리시에서 “태왕비를 복원하겠다”는 부탁이 왔다니, 태왕의 영령이 도와주셨다는 말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이윽고 자문위원회의 고증을 거쳐 100여톤의 원석을 이 고장에 사는 중요무형문화재 이재순 석장(石匠)이 다듬고 다듬어 50여톤의 비신(碑身)을 완성 했다.

집안시에 있는 원비석의 재질은 응회암으로 같은 화강암 계통이지만 밀도가 청오석보다 낮아 10여톤의 무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 박영순 시장(왼쪽)이 전홍규 원장의 도움으로 시각하고 있다.     © 송영한

일본인 위조 이전 탁본 구해, 진실까지 복각

태왕비에 새겨진 글씨체는 전서, 해서, 예서, 행서, 초서 등 적게는 5체, 많게는 7개의 글씨체가 섞여있다. 전 원장은“금석학계에서는 5개 이상의 글씨체가 복합된 비석으로 태왕비가 유일하다”며“태왕비의 글씨 크기는 사방10~15cm로 평균 13cm인데 이 같은 오차는 종이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서 새긴 것이 아니라 돌 위에 직접 먹줄을 치고 글씨를 새겼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직접 돌가루와 시멘트를 섞어서 만든 실물크기 모형에 글씨를 새길 때 두 사람이 먹줄을 튕겨보니 정말 똑 같이 오차가 나더라는 것이다.

이번 태왕비 복원에 사용한 탁본은 일제 때 일본육군참모본부 소속 중위 사코 가케노부(酒勾景信)등이 석회를 발라 위조한 선명한 탁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중국에서 뜬 탁본을 구해 위조 이전의 모양을 완벽하게 복원할 예정이며 중국인들이 때운 비의 굴절부분도 원래대로 복원할 생각이다.

전 원장은 "복원할 태왕비는 글씨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풍화돼 마모된 부분까지 탁본대로 복원할 것이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일본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부분도 위조 이전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높이 6.3m 무게50톤의 태왕비 전면에 복각할 탁본이 붙어있다.     © 송영한

동상, 태왕비, 고구려역사기념관에 이어 테마공원까지

민선2기 때 광개토태왕 동상을 세우고 4기 들어 태왕비를 복원하게 된 박영순 구리시장은 “재임 시에 호태왕의 동상과 비를 세우게 돼 영광”이라며“이미 국민성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고구려역사기념관과 고구려 테마공원까지 완성해 중국에 빼앗긴 고구려 역사를 되찾아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시장은 “고구려가 망할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눌러앉았다고 알려진 보장왕의 둘째 아들 약광(若光)의 60대손인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의 코마(高麗)신사의 궁주(宮主)를 비롯한 약광의 후손들이 태왕비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더욱 뜻 깊은 제막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태왕비가 세워 질 구리시 교문동 미관광장 바로 옆에는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유적지와 태왕사신기의 세트장인 ‘고구려 대장간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찬란했던 문화를 이어받아 배달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우뚝 설 것으로 보인다.
 
▲ 자문위원인 서영수 단국대 교수(왼족에서 두 번째)와 전홍규 원장(왼쪽에서 3번째)이 복원 전문가들과 비문 해석을 하고 있다.     © 송영한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Oh my news)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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